2007년 4월 26일 (목)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수학여행! 많이 준비하지 못한 탓에 두려움도 많았지만 그래도 기대가 앞섰다. 인천에서 아침 10시정도에 비행기를 타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대 1호관에서 a.m. 1시 30분에 만났다. 사람들이 짐을 끌고 하나둘씩 도착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설레는 것 같았다. 2시에 광주를 출발했는데 너무 피곤해서였는지 버스를 타자마자 잠이 들어 눈을 떠보니 아침 6시였다. 출국심사를 한 후,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는 한 1시간정도 시간이 남아 면세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이때까지는 여행을 간다는 것이 별로 실감나지 않았는데 48번 gate로 가서 우리가 탈 비행기를 보니, 중국을 간다는 것이 실감났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비행기탑승!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근처에 앉아있는 사람들끼리 사진도 찍고 구름 위의 풍경을 찍었다. 맛있는 기내식을 먹고 나서 피곤해서였는지 많이들 잠이 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서야 나는 카메라를 비행기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실수는 처음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다행히도 여행사 관계자분과 가이드가 도움을 주셔서 카메라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마음씨 좋게 생긴 가이드 아저씨와 만나 인사를 나눈 후 버스를 타고 점심을 먹기 위해 북경 시내로 향했다. 중국간판, 자전거 타는 사람들, 중국말, 지도에서만 보던 그 큰 나라의 수도에 내가 와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중국 시내 길의 큰 특징이 하나 있었는데 신호등이 많이 있지 않고 대부분 도로가 순환도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느낀 한국과의 큰 차이점이었다. 우리의 첫 점심은 한국식이었는데 기내식을 먹은 지 얼마 안돼서인지 배가 많이 고프지는 않아서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맛있었던 것 같다. 짐도 풀지 않은 채 바로 수족관으로 향했다. 여러 가지 물고기들이 많았는데 한국의 수족관과 큰 차이점은 없는 듯 했다. 그래도 왔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셔터를 눌렀다.
다시 버스에 올라 천단공원으로 이동했다. 이곳에 오니 중국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사람들도 너무 많았는데 가는 길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전통악기를 연구하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는데 TV에서 보던 것과 똑같았다. 이곳은 정말 중국의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규모도 정말 컸는데, 많이 보지도 않고 걷기만 했는데도 한 2시간정도가 소요됐다. 천단이 모자모양을 닮았다고 가이드아저씨가 설명해주셨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가 이래저래 많았다. 중앙은 1년 사계절을, 가운데 12개의 기둥은 12개월을, 바깥쪽의 12개 기둥은 2시간을 내외 처마 기둥 24개는 24개의 절기를 각각 상징한다고 한다. 듣고 나서 보니 천단이 정말 모자모양으로 보였다. 들어온 입구와는 다른 곳으로 나갔는데 가는 길에 보니 길 가운데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다. 이 길은 옥황상제가 다니는 길이라 해서 황제도 걸을 수 없는 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가운데로 걷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천단공원을 쭉 둘러본 후 차를 타고 15분쯤 이동해서 써커스를 보러갔다.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기대이상이었다. 사람의 몸이 어떻게 그렇게 유연할 수가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실 신기하기도 했지만, 어린 아이들이 공연을 하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도 한편으로는 들었다. 접시돌리기, 훌라후프 뛰어넘기 등, 여러 가지 공연들이 많았는데 난 그중에서 모자 돌리기가 가장 재밌었던 것 같다. 모자 여러개를 가지고 묘기를 부리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그리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갔다. “태가촌”이라는 중국 전통 음식집이었다. 탁자위에 유리가 돌아갔는데 금방 익숙해지긴 했지만 처음에는 너무 신기했다. 몇 몇 입에 안 맞는 요리들도 있었지만, 파인애플을 곁들인 닭고기 요리 정도는 먹을 만 했다. 그리고 모든 요리의 주된 특징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대부분의 요리가 기름으로 된 거라는 것. 중국은 또 차로도 유명한데, 이렇게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차를 많이 마신다고 한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한 시간쯤을 달려 숙소로 도착했다. 차에서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계속 잤다. 숙소 도착! 만든 지 얼마 안 된 호텔이라 그런지 내부가 깨끗해서 맘에 들었다. 새벽부터 출발해서 쉴 새 없이 돌아다녀서 그런지 많이 피곤해서인지 모두들 일찍 잠이 들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던 중국에서의 첫날이었다.
2007년 4월 27일 (금)
따릉~ 따르르릉~!!!
호텔 카운트에서 주는 모닝콜에 눈을 뜬 건 6시. 숙소에서 맞이하는 첫날 아침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서 우리가 모인 시간은 7시 30분. 어제 저녁 늦게까지 놀아버린 우리들에게 조금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여행기간 중 가장 빡빡할 지도 모른다는 오늘의 일정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일찌감치 첫 번째 목적지인 북경대학으로 향했다.
북경 대학에 도착하자, (주형관 교수님과 몇 년간 함께 연구하며 논문을 쓰셨다는) 현 북경대 교수님이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주형관 교수님께선 웃음꽃이 활짝 피셨고, 덕분에 우리는 (원래는 관광객 출입이 제한된다는) 대학 내를, 학교역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으며 탐방할 수 있었다. (물론, 주형관 교수님께서 완벽한 통역사가 되어주셨다^.^) 또 그분이 안내해 준 수학과 건물 앞에서는 기념사진도 찍었는데, 북경 대학은 모든 건물의 지붕이 기와로 되어 있고, 건물도 하나같이 예쁜데다 정말 넓어서, 학교가 아니라 옛 고궁에 소풍 나온 듯 한 기분이었다.
이어서 북경대학에서 멀지 않은 청화대학으로 갔다. 청화대학은 중국대학 서열 1위인 동시에 자연과학 쪽으로도 꽤나 유명한 대학이라고 했다. 북경대학에서처럼 버스가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기 때문에 정문에서부터 걸어서 교내 탐방을 했는데, 학교가 너무나 넓은 나머지 정작 학교 건물 앞까지 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대신, 학교 안에서 만난 중국 학생들과 이야기도하고 함께 사진도 찍었는데, 이렇게 큰 학교에서, 다른 나라 학생들과 같이 어울리고, 열심히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점심을 먹고서는, 중화 민족촌 이라는 곳에 같다. 이곳은 중국의 소수 민족, 그러니까 평소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인과는 약간은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그네들의 작은 공연을 보았는데, 마지막에는 관객도 함께 참여하여 율동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 역시 앞에 나가 어울렸는데,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문화를 체험 했다는 게 내게 너무나 좋은 추억이 되었고, 동작이 서투른 내 옆에서 박자를 세주며 율동을 가르쳐 주던 그 소녀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다음으로는 서태후의 여름별장. 이화원에 갔다. 여기에선 한 여자가 지닌 강한 권력의 힘을 느낄 수 있었는데,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인공호수와 인공 산을 보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를 비롯한 여학생들은 서로 전생에 휴가를 즐기러 와 본 것 같다고 우겼다는^^;; ※본인이 전생에 서태후였단 의미임. -_-;; ) 그리고, 예전에 서태후가 자신이 거느리는 내시와 함께 걸어갔다는 매우 긴 복도를 따라 걸었는데, 주로 중국 고대 소설에 나오는 이 그림은 하나도 같은 게 없으며, 내시가 서태후와 함께 걸으며 그림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했다는 가이드 아저씨의 부연 설명을 들으니 서태후의 포스가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이곳을 지금의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공원처럼 이용하는 것 같았는데, 긴 복도 곳곳에서 제기차기, 악기 연주, 노래, 춤, 장기, 등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중국 사람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어 좋았다. 또 하나, 교모 오빠와 봉찬이 오빠가 제기놀이를 하는 중국인들 사이에 끼었는데, 오히려 더 잘해서 다들 즐거워했다.
점심때 먹은 전통 중국 음식과는 달리, 저녁은 담백한 한국식으로 먹고서, 앞으로 남은 여행 기간 동안 먹을 간식 등을 사기 위해 마트에 들렸다. 한국에서의 가격과 비교하면서 이것저것 과자와 음료수 등을 카트에 넣고, 나름 즐겁고, 유쾌한 쇼핑을 했고, 저녁에는 숙소에 와서는 호텔 식당을 빌려, 두 분 교수님과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큼은 정말로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다.♡
2007년 4월 28일 (토)
오늘 일정의 시작은 8시 반이었다. 모두다 시간엄수의 중요성을 알기에 서로서로를 깨우며 준비하고 2층의 호텔 조식을 먹으러 갔다. 역시나 낮선 음식들~ 그래도 3일째가 되니 이제 적응도 되가는 것 같았고 맛있었다. 그리고 젤 중요한 디지털 카메라를 챙기고 호텔 앞에 모였다.
우리의 첫 번째 일정은 바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을 간략히 칭하여 ‘장성(長成)’이라고 부른다. 만리장성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자 중국 고대의 중요한 군사시설로 방어용 성벽이다. 사실 10리는 4Km로, 계산적으로 만리(萬里)는 4,000Km가 되지만 만리장성은 4,000Km가 훨씬 넘는 거리이다. 그러므로 만리장성이라는 말은 긴 성(城)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이다. 그리고 모택동 이 만리장성에서 일찍이 “장성을 오르지 않고서는 사내대장부라고 할 수 없다(不到長城非好漢)”이라는 말을 남겨서 유명하고, ‘달에서도 유일하게 보이는 인공 건축물‘이라는 말이 있지만 달에서는 만리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만리장성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1987년 등록되었다. 우리는 한시간반정도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에 보이는 성벽들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성벽을 걷는 관광객들의 모습을 보고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너무 좋았다. 아래를 보니 아찔아찔했지만 역시 좋은 경험이었다.
현지식의 점심을 먹었는데 중식과 한식이 같이 나와서 더욱 좋았다. 말로만 느끼하다 들었지만 정말 향신료 향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들도 참 많았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기념품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고 오후 일정을 향해 차에 올라탔다. 정말 날씨가 너무 좋았다.
두 번째 일정은 명조 3대 황제부터 최후황제까지 13명의 황제가 묻힌 묘역 : 명 13릉‘ 이었다. 차 속에서 가이드 아저씨의 설명을 자세히 들어보니 정말 재미있는 얘기도 참 많았다. 우리가 보는 곳은 정릉이며 명 왕조가 북경으로 천도한 후 13명의 선조 황제의 릉을 이곳에 이장하였다고 한다. 명나라 선조의 장릉이 명 영락7년에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에 11개의 릉이 장릉의 양 옆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13능의 정문인 대홍문을 들어서면 능 입구인 참도가 있는데, 비석을 풍우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여러 석상을 세워 놓았다. 양쪽으로 갑옷으로 무장한 문관 12개의 석상과 사자, 낙타, 코끼리, 기린, 말 등의 동물 석상이 늘어서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신기했다. 이 석상들은 단순히 장식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황제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정릉에 들어가기 전에 박물관에 들렸다. 박물관에는 그 시대 사용한 명나라 돈, 그림, 전체 능 모형, 옥새 등이 보기 좋게 잘 전시돼있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성곽 같은 곳을 올라 가 보니 1956년에 최초로 발굴한 정릉 지하 궁전의 입구가 보였다. 크고도 넓으면 신비로운 느낌마저도 났다. 지하 궁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항에서처럼 줄을 서서 검사를 받고 들어가야 했다. 역시 철저했다 조금의 두려움을 가지고 검사가 끝난 후 지하 9층 정7,8층 되는 깊이로 난 계단을 어느덧 내려가 보니 황제의 빨갛게 칠해진 황제와 황후의 관이 놓여 있었다. 어떻게 지하 9층 정도의 밑에 이런 게 있을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무덤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지도 생각하면 정말 오싹한 곳이었다. 또 관의 겉은 그저 단순히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어 이게 황제의 관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쓸쓸해 보이고 명나라 쇠퇴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 여러 나라 사람들의 지폐와 동전이 던져있었는데 소원을 빌었나보다.
그리고 발마사지를 받으러 가야 하는데 그 전에 라텍스 방문해서 침대 체험도 하고 밖에 나와서 저녁에 먹을 과일도 흥정해가면서 샀는데 이런 경험이 더욱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어느새 흥정 하는 사이 차 타이어에 문제가 생겨서 우리는 기다렸다. 한시간정도 서서 사진 찍고 얘기하고 하니깐 발마사지 일정은 내일로 미뤄지고 우리는 샤브샤브를 맛있게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큰 마트에 가서 음식도 사고 호텔로 돌아왔다.
2007년 4월 29일 (일)
아침에 간단히 식사를 하고 버스에 탔다. 오늘은 천안문과 자금성과 유리창거리와 옹화궁을 들리기로 하였다. 가이드가 오늘은 좀 많이 걷는다고 하였다. 그런 말을 들어서인지 왠지 오늘따라 공기도 더 안 좋고, 날씨도 무지 더운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 중국 정부가 천안문에 모인 사람들을 군대를 동원하여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중국의 보수파와 개화파의 충돌 이였다고 한다. 물론 우리 세대는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광주도 80년대에 5.18이 있었기 때문인지 천안문사태가 더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천안문광장에 도착하였다. 천안문 광장은 사람이 정말 많았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빈 공간이 보이게 만드는 광장의 크기였다. 여행 다니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확실히 중국은 큰 걸 좋아한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우리들은 광장의 가운데에 위치한 탑에서 모이기로 하고 자유 시간을 가졌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일행과 멀어지면 큰일이 난다고 가이드가 계속 주의를 준 탓인지 탑 주변에서만 사진을 찍고 놀았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의 사진을 이렇게 큰 광장에다가 계시하지 않아서인지 탑과 천안문에 모택동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확실히 다른 국가라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사진을 찍고 나서 천안문 광장을 통과하여서 자금성으로 향하였다. 자금성 내로 들어가는 길에 여러 문들을 통과하였는데 그 문들 위로 고대 중국 관료들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사람들 옆으로 다른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중국의 관광객들을 위한 배려인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자금성은 무척 컸다. 그리고 건물의 지붕들이 모두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역시 고대부터 대국이었던 중국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자금성내의 많은 건물들이 공사 중이라서 모든 건물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천천히 출구로 향하였다. 사실 이런 건물의 외관 같은 것은 한국에서도 사진으로 많이 봐 온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의 침실이나 황제의 방 같은 것을 창문을 통해서 안을 봐야 할 때에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금성 역시 사람이 워낙 많아서 어느 한도 이상을 가게 되자 뒷사람에게 밀리듯이 길을 가게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 가이드분이 노동절에 자금성에 간다면 입구부터 출구까지 사람에게 떠밀려서 나가게 될 거라는 말이 실감나게 하는 순간 이였다. 게다가 이 자금성이 중국에 있어서 많은 의미와 볼거리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금성 내의 공사가 끝난다면 이렇게 짧은 관광이 아니라 더 자세하게 자금성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들 너무 큰 자금성 때문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유리창 거리로 향하였다. 좀 피곤해서인지 버스 안에서 자버렸다. 그래서 이 유리창 거리가 왜 유리창 거리라고 불리는 지의 설명을 못 들었다. 그리고 유리창 거리에 도착하였다. 이 유리창 거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중세 중국의 모습 그대로였다. 뭔가 잡다한 물건들도 많이 있었고, 신기한 물건들도 있었다. 게다가 물건을 살 때에 흥정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물건을 가리키고 좀 안 되는 영어이긴 해도 ‘How much is it?’ 식으로 말하면 상인들이 계산기에다가 숫자를 입력하여서 보여주었다. 그러면 계속 계산기에 입력된 숫자를 바꾸다가 둘의 의견이 맞게 되면 그 값을 치르고 물건을 샀다. 말도 안 통하는 중국인들과도 흥정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재미있었다. 가끔 중국 공안들이 다니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도 주었다.
중국 옹화궁으로 갔다. 옹화궁은 북경 최대의 라마교 사원이라고 한다. 입구에서부터 굉장히 큰 종이 눈에 띄었다. 그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일정 돈을 주면 그 종을 직접 칠 수 있는 것 같았다. 옹화궁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손으로 돌리면 계속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원통형의 물체이었다. 라마교는 글을 못 배운 사람들이 많은 종교라고 한다. 그래서 라마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경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종교이다가 보니 경전을 읽어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그 원통이다. 경전을 못 읽는 사람들이 그 원통을 돌리면 라마교의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용화궁을 보니 곳곳에 향도 많이 꽂혀 있고 상에다가 진지하게 절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왠지 그런 모습을 보자 우리에게 있어서 옹화궁은 우리나라에선 흔히 볼 수 없는 모습 그 이상의 의미는 별로 없지만, 그들에겐 신성한 성지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눈으로 용화궁을 보니까 왠지 나도 엄숙하게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코스가 많이 힘들어서 모두들 발마사지에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발마사지 하는 곳으로 갔다. 나름 저녁마다 아빠를 안마해주는 입장에서도 이곳이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나랑은 어떻게 다르게 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이 힘드니까 피로도 풀리길 기대했다. 먼저 한약 재료랑 같이 끓인 물에다가 발을 씻고 나서 의자 위에 누웠다. 안마사가 안마를 하기 전에 간지러우면 어떻게 할까. 혹은 아프면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말이 다르니까 내가 아파도 그것을 잘 전달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다행히 안마사가 어느 정도 한국말을 할 줄 알아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몇 명 간지럼을 많이 타는 사람들 때문에 덩달아 나도 웃음이 나고 그랬다. 대략 40분정도 하고 나서 밖에 나와 버스에 탔다.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 안마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특히 주먹으로 등이나 어깨를 칠 때에 소리가 내가 칠 때랑은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안마를 받고 나자 오늘 하루 동안 쌓였던 피로 같은 것이 쭉 풀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저녁은 북경오리를 먹었다. 전병과 춘장과 파 같은 것과 같이 나오자 대체 이것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 것인지 몰라서 당황했는데 다행히 아가씨가 와서 전병에 오리를 싸먹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많은 학생들이 중국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음식도 남기고 그랬었는데 다행히 북경오리는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라서 많은 기대를 하고 갔었고, 또 기대한 만큼 즐기고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사소한 생필품의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같은 동양이고 같은 문화권으로만 생각해왔던 중국을 직접 찾아가보니 뭐든지 크고, 화려하게 꾸며놓는 모습을 보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2007년 4월 30일 (월)
북경에 온지 4박 5일. 벌써 우리는 출발지였던 역동적인 한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먹는 호텔의 조식은 그동안 그래왔듯이 볶음밥에 고기와 소금을 뿌린 계란 후라이를 넣고는 과일과 함께 먹었다. 이런 조합으로 아침을 먹는다는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고 정갈한 우리나라의 음식을 다시금 접할 수 있다는 마음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4성급 호텔이라 선전하였지만 그에 못 미치는 시설에서 틀었던 둥지를 다시 수습하고는 뭐 두고 온 것은 없을까? 하며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팁으로 그동안 수고했다면 탁상에 당당히 천원 지폐를 올려놓고는 호텔 밖으로 나왔다. 모두들 어제 너무 무리했는지 공항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은 고요했고 나는 마음 깊이 안온해지는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안녕 중국! 안녕 베이징!
처음 도착해서는 내가 인천의 차이나타운에 있는 것인지 베이징에 있는 것인지 실감이 안 났다. 처음 도착한 천단공원은 그 크기가 크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고궁과는 사뭇 다른 건축양식과 색감에 매료되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제야 베이징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으리라! 그리고는 부국해저 세계에서는 어줍지 않은 중국어로 모두를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씩 물고서는 메이드 인 차이나 표 아이스크림을 평가하기에 입이 바빴다. 그 다음날인 2일째 여행에서는 중국의 명문대인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을 방문해 캠퍼스 여기저기서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리고는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에서 인공호수와 인공 산을 보며 청 말기의 한 여인 서태후와 격동의 중국역사를 되새기곤 하였다. 3~4일째 방문했던 천안문 광장, 자금성, 명13릉, 유리창 거리, 만리장성에서 TV나 사진으로만 만나보던 그 느낌이 아닌 새로운 동질감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동질감은 아마도 여행이 주는 낯선 환경에서 자기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에 가능하겠지만, 고국인 한국과 인접한 나라로서 우리의 역사와 때로는 소통하고 때로는 싸우며 때로는 공존했던 기나긴 세월의 무게 때문 일 것이다. 그렇다 내가 또는 우리들이 이 여행을 온 목적은 현실로의 도피나 여가활동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설사 의도가 그러하다고 해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짧고도 압축전이였던,. 바쁜 학기 중에는 수학여행이 말 그대로 무엇을 수학하게 했는지 말이다. 그 첫째는 소통하는 공동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중수교가 되기 전인 16년 전쯤에는 이런 여행이 가능하겠는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들끼리의 수교는 탈냉전 시대의 산물이며 소통하고 나아가는 국가 공동체의 세계화를 나타내리라. 그 둘째는 나와 다른 문화를 인지하고 인정하고 나아가서 서로 저항하고 융합되는 문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러 역사 유적지를 탐방하고 그 곳의 문화와 함께 호흡하며 얻은 것은 기념품과 기념사진들 따위가 아니 그 보다 값진 문화의 다양성을 오감으로 체험하며, 우리나라를 또는 우리를 또는 나를 중심지우지 않고 세계 60억 인구의 로 인지하게 만드는 겸손함을 알려주리라. 그 마지막으로는 낯선 여행지에서 나 자신을 보여 지는 내가 아닌 바라보는 나로 인식 하게 만들어 나를 객관화시켜 문제를 부각시키고 옳게 평가 할 수 있는 점이다. 이로 인해 나 자신은 나도 모르는 성숙함을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아 놓고는 다시 바쁜 일상에서 하나의 부품처럼 살아가리라. 거대한 땅덩어리를 품고 거대한 문화를 품고 그렇게 안온하게 말이다.